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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와 행위예술: 소리가 장면이 될 때

by edu414 2025. 9. 18.

아방가르드음악과 행위예술

20th-Century Music

아방가르드와 행위예술 : 소리가 장면이 될 때

 

서론: 소리의 경계를 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들은 “무엇을 음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정말 진지하게 던지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악기와 악보, 무대와 객석이라는 익숙한 틀을 흔들었고, 어느 순간 음악은 소리만이 아니라 시간과 신체의 존재와 움직임, 그리고 장면 전체를 포함하는 경험으로 확장되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존 케이지라는 작곡가가 있었다. 그의 실험은 음악의 정의를 넓혔고, 그 여파는 시각예술에서 올라온 행위예술(Performance Art)과 만나 새로운 지형을 만들었다. 이 글은 그 지형이 어떻게 열렸는지, 그리고 왜 지금도 의미가 있는지 천천히 이야기해 보려 한다.

1. 행위예술은 어디서 왔나

행위예술은 음악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가지가 아니다. 뿌리는 시각예술 쪽에 있다. 20세기 초 다다이즘·미래파 같은 전위 예술이 “틀 깨기”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전후에는 앨런 카프로가 ‘해프닝’이라 불린 실험을 통해 작품 그 자체보다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행위에 주목하도록 유도했다. 관객이 참여하고, 일상적인 동작이 그대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꽤 신선했다. 이런 흐름은 곧 플럭서스(Fluxus)라는 국제적 네트워크와도 연결된다. 짧은 지시문을 가지고 퍼포먼스를 ‘연주’하는 방식은, 어딘가 음악의 악보를 닮아 있었다. 이 지점이 바로 음악과 행위예술이 서로 말을 트기 시작한 순간이다.

2. 케이지: 음악에서 ‘상황’으로

케이지는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작곡을 훨씬 넘어섰다. “작곡가가 모든 것을 지시해야만 음악일까? 연주자가 하는 행위, 공연이 열리는 공간의 소리, 우연히 섞이는 잡음은 음악이 될 수 없을까?” 케이지는 동양 사상(특히 주역)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우연과 불확정성을 작곡에 들여왔다. 동전을 던져 음을 고르고, 준비된(프리페어드) 피아노로 기성 악기의 고정된 소리를 낯설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그는 공연이 벌어지는 상황 전체를 작품의 일부로 보았다. 중요한 건 “정답 같은 소리”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발생하는 청취 경험이었다. 이 태도는 음악의 경계를 넓혔고, 미술·무용과의 협업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케이지의 아이디어는 블랙 마운틴 칼리지 같은 실험 무대를 거치며, 음악이 무대적 사건으로 변해도 좋다는 확신을 퍼뜨렸다.

3. 플럭서스: 보이는 ‘악보’, 들리는 ‘장면’

케이지의 생각이 도화선이 되자,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이벤트 스코어(Event Score)라는 짧은 지시문을 통해 음악과 행위를 한자리에 놓았다. “한 줄을 긋고 따라가라”, “물방울이 떨어지게 하라” 같은 문장은 전통적 의미의 멜로디·화성을 요구하지 않지만, 분명히 시간을 설계하고 행위를 유도한다. 이것은 음악의 악보가 하는 일과 참 닮아 있다.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장면을 떠올려 보자. 어느 무대에서, 누군가가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 올리다가 조용히 부순다. 그 사이의 긴장, 공기의 변화, 관객의 숨소리까지 모두 작품의 일부가 된다(백남준의 “One for Violin Solo”). 또 다른 무대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울린다. 그 단순한 소리는 생각보다 풍성한 시간감을 만들어낸다(조지 브레히트의 “Drip Music”). 라 몬테 영은 한두 음을 아주 길게 지속시키며, 우리가 시간을 듣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는 “보이는 행위”를 통해 “들리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

4. 케이지 × 커닝햄: 춤과 소리, 서로의 자유

케이지는 안무가 머스 커닝햄과 오랫동안 협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음악과 춤을 서로 독립적으로 만들고 공연 순간에 겹치게 했다는 것이다. 음악이 춤을 설명하지 않고, 춤이 음악을 해석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연히 교차한다. 관객은 그 교차의 순간마다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다. 이 방식은 이후 멀티미디어 공연과 현대무용, 설치 작업으로까지 퍼지며, “장르를 나누는 일”보다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음을 보여준다.

5. 왜 음악사에서 중요한가

행위예술과의 만남이 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변화는, 악보의 의미가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악보는 음높이와 리듬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동작, 동선, 물건의 사용, 무대의 배치, 관객의 역할까지 작곡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덕분에 음악은 소리 중심의 예술에서, 시간-몸-공간을 아우르는 사건으로 넓어졌다.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저자의 위치다. 우연과 선택, 관객 참여가 커질수록, 작품은 하나의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의 묶음이 된다. 공연마다 결과가 달라지는 열린 구조는, 청중에게도 탐험의 감각을 준다. 더불어 전자매체와 영상, 설치를 아우르는 사운드아트인터미디어가 본격화된 배경에도 이 만남이 있었다.

6. 같은 질문, 다른 계보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행위예술은 아방가르드 음악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행위예술은 시각예술에서 출발한 별도의 계보를 갖는다. 다만 케이지의 급진적 실험이 매개가 되어, 음악과 행위예술이 강하게 접속했다. 그리고 그 접속은 우연성·알레아 같은 음악 내부의 변화와도 서로 자극을 주고받았다. 다시 말해, 이 만남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포함’했다기보다, 둘이 같은 질문을 공유하며 큰 강줄기를 함께 만든 셈이다.

맺음말: 장르너머, 경험의 설계

오늘날 공연장과 전시장, 그리고 페스티벌의 경계는 예전만큼 뚜렷하지 않다. 한 무대에서 우리는 소리를 듣고, 몸을 보고, 공간을 느낀다. 아방가르드 음악과 행위예술의 만남은 바로 이런 감각의 길을 열었다. 케이지 이후의 예술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이 지금 듣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장면은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며 우리는, 음악을 더 넓은 경험의 예술로 받아들이게 된다. 장르는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경험 자체다. 소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공유되는가,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일이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아방가르드한 청취일지도 모른다.

© 20세기 음악 7편 · 아방가르드 음악과 행위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