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축으로 본 음악사 — 음조직·리듬·음색·매체
서론: “이 음악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나?”
낯선 곡을 들을 때 길을 잃지 않는 법이 있다. 소리를 조직하는 방식(음조직), 시간을 자르는 법(리듬/미터), 쓰인 재료(음색/악기), 남는 흔적(매체/표기)—이 네 가지만 보면 된다. 시대는 이 네 축을 다른 조합으로 설계하고, 그 조합이 각 시대의 얼굴을 만든다.
1) 음조직: 선법에서 장·단조, 그리고 해체와 재구성까지
초기의 교회음악은 선법(모드)으로 질서를 잡았다. 르네상스의 다성대위는 각 성부가 서로를 의지하며 움직이는 법을 정교하게 세웠고, 바로크·고전기에 들어서면 장·단조와 기능화성이 중심이 된다. 긴장과 해소가 분명해지고, 소나타 형식 같은 이야기틀이 힘을 얻는다.
낭만으로 오면 크로매틱시즘이 팽창하며 조성의 경계가 흐려진다. 20세기 초에는 무조와 12음/음렬(제2빈 악파)이 등장해 기능화성의 규칙을 바깥에서 흔든다. 그러나 ‘파괴’로 끝나지 않았다. 어떤 길은 신고전주의처럼 간결한 질서로 돌아갔고, 어떤 길은 민족 선법·민요 재료를 끌어와 조성의 색을 새로 칠했다. 또 어떤 흐름은 스펙트럼(배음 구조)을 바탕으로 음색 속에서 질서를 찾았다.
2) 리듬/미터: 정량화에서 분해·겹침으로
아르스 노바의 정량 기보는 시간을 수학처럼 쪼개는 능력을 줬다. 바로크·고전은 주기적 박과 댄스 리듬을 바탕으로 균형을 만들고, 낭만은 루바토로 호흡을 늘였다 줄였다 한다.
20세기에 들어선 변미터·강박의 이동, 비대칭 박자(5/8·7/8), 폴리리듬이 표면을 흔든다. 미니멀 음악은 페이징처럼 시간의 어긋남 자체를 아이디어로 삼고, 재즈·팝은 그루브라는 미세한 흔들림에 전체 감각을 건다.
3) 음색/악기: 오케스트라에서 전자·스튜디오까지
르네상스의 성악과 비올, 바로크의 현악군과 통주저음, 고전의 표준 오케스트라는 낭만에 이르러 규모가 커진다(목관 2관 → 3·4관, 타악 확대). 그런데 20세기는 방향을 바꾼다. 마이크·확성이 등장하고, 테레민·온디 마르트노 같은 전자악기가 태어나며, 이어 신시사이저·샘플러·컴퓨터가 창작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이때부터 스튜디오 자체가 악기가 된다.
동시에 기존 악기에서도 확장 주법이 일반화된다. 현을 두드리거나 활을 브릿지 근처에서 긁고, 피아노 현 사이에 물체를 넣어 소리를 바꾸는 식이다(프리페어드 피아노). 20세기 중후반의 관현악은 멜로디보다 질감과 질량(리게티, 펜데레츠키)을 전면에 낸다.
4) 매체/표기: 악보에서 녹음, 그리고 스트리밍
네움에서 오선보, 인쇄의 보급은 작곡과 유통의 시장을 만들었다. 20세기에 녹음이 중심으로 올라오며, 작품의 “원본”은 종이에서 소리 파일로 이동한다. 라디오·영화·LP·카세트·CD를 지나 스트리밍이 표준이 되자, 제작 방식·듣는 습관·수익 구조가 함께 바뀐다.
표기의 세계도 넓어진다. 그래픽 악보, 텍스트 스코어(짧은 지시문), DAW 타임라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규정하는 기록”이 된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적고 남기는가”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와 한 몸이 된다.
5) 작은 사례: 네 축으로 빠르게 읽어보기
- 팔레스트리나의 미사 · 음조직: 선법·다성대위. 리듬: 균형·유연. 음색: 성악 중심, 긴 잔향의 공간. 매체: 악보·성가대 전승. → 공간과 질서가 만든 투명함.
- 하이든 교향곡 · 음조직: 장·단조·기능화성, 소나타 형식. 리듬: 주기적 박과 댄스의 감각. 음색: 표준 오케스트라. 매체: 인쇄·공공 콘서트. → 도시·시민사회의 청취 방식.
- 바그너 이후 · 음조직: 크로매티시즘 확대(귀환의 지연). 리듬: 유연·확장. 음색: 거대 오케스트라. 매체: 극장·장편. → 서사적 몰입과 대형주의.
- 제2빈 악파 · 음조직: 무조·음열. 리듬: 정밀·세분. 음색: 실내악·작은 편성의 밀도. 매체: 악보 중심. → 질서 재설계의 실험.
- 리게티 Atmosphères · 음조직: 음높이보다 질감/미세층. 리듬: 표면 정지 속 내부 움직임. 음색: 현·관의 미세섬유. 매체: 홀·녹음. → “질량으로 듣기”.
- 스튜디오 팝 · 음조직: 간결한 조성·후렴 중심. 리듬: 그루브 엔진. 음색: 샘플·신스·보컬 프로덕션. 매체: 파일/스트리밍, 이어폰 전제. → 프로듀싱=작곡.
6) 네 축은 서로를 바꾼다
한 축의 변화는 다른 축을 끌어당긴다. 매체의 전환(녹음 중심)은 음색 실험을 촉진했고, 그 결과 음조직의 관심이 음높이에서 텍스처로 이동했다. 리듬도 마찬가지다. 클럽·페스티벌의 공간/사운드 시스템은 낮고 두터운 주파수의 신체적 리듬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기술과 공간이 바뀌면 작곡의 질문도 바뀐다.
7) 한눈 체크리스트
2) 시간은 어떻게 흐르나?(주기/변미터/폴리리듬/페이징)
3) 소리는 어디서 나왔나?(성대/현·관/전자/스튜디오)
4) 무엇으로 남았나?(악보/녹음/파일/지시문/그래픽)
맺음말: 네 개의 창으로 본 한 시대
음조직·리듬·음색·매체는 도구가 아니라 창문이다. 같은 시대, 같은 도시 안에서도 누구는 조성을 지키고, 누구는 리듬을 비틀고, 누구는 음색을 해체하고, 누구는 매체를 갈아탄다. 네 창을 통해 보면, 작품은 한 줄의 연표가 아니라 선택의 조합으로 보인다. 다음 편에서는 시간의 축을 계속 따라가며, 후원·공간/청취·저자성·형식/즉흥을 살핀다. 음악은 누가 비용을 내고,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듣는가에 따라 또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