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왜 평균율인가
르네상스의 순정률은 화음의 맑음을 극대화했지만, 전조가 잦아질수록 음정 불일치가 누적되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바로크 이후 작곡가들은 먼 관계조로 이동하며 긴 호흡의 조성 드라마를 설계했고, 건반·현악·관악의 결합이 촘촘해질수록 “모든 조에서도 비슷한 안정성”이 필요해졌다. 평균율은 바로 이 요구에 대한 입길이다. 한 옥타브를 12개의 동일한 비율로 나누어, 어느 조로 가도 음정 감각이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만든다. 완벽한 순정의 아름다움을 일부 양보하는 대신, 전 조성의 이동 가능성과 작곡 자유도를 폭발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 타협은 결과적으로 근대 음악의 표현 언어, 즉 모듈화 된 조성 공간을 탄생시켰다.
원리: 21/12와 로그 감각
평균율의 수학은 간결하다. 옥타브는 주파수의 2배(1:2)라는 사실에서 출발해, 그 거리를 12개의 동일한 비율로 나눈다. 각 반음은 21/12배 만큼의 주파수 차이를 갖고, n개의 반음 차이는 2n/12로 계산된다. 이때 인간의 음고 지각이 대략 로그(비율)에 민감하다는 점과도 잘 들어맞는다. 반음이 진행될 때마다 일정한 “느낌의 거리”를 제공하니, 어떤 출발음이든 같은 ‘단계 수’만큼 움직이면 비슷한 체감 변화를 얻는다. 이 통일감 덕분에 전조·이조·조차 변화가 단순해지고, 악기의 제작·조율·합주 표준화가 용이해진다. 수학적으로는 미세 오차가 생기지만, 그 오차를 12곳에 고르게 분산해 어느 한 곳도 지나치게 거슬리지 않도록 만든 구조다.
역사: ‘웰 템퍼라멘트(Well Temperament)’와 평균율의 분기
르네상스 말~바로크 초에는 ‘웰 템퍼라멘트(Well Temperament)’가 널리 쓰였다. '웰 템퍼라멘트'는 조마다 성격을 달리 부여해, 어떤 조는 밝고 열린 울림, 다른 조는 어둡고 긴장된 울림을 갖게 했다. 이 체계는 전조의 자유를 상당 부분 허용하면서도, 조별 색채를 보존한다는 점에서 미학적 매력이 컸다. 반면 평균율(12-TET)은 모든 조를 “거의 동일하게” 만들려는 반대편 극단이다. 17~18세기 유럽에서는 평균율에 가까운 사고가 점차 힘을 얻었고, 건반악기 레퍼토리의 확장과 함께 실용성이 부각되었다. 이 흐름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라는 상징적 레퍼토리로 대중화되었다(역사학적으로는 ‘웰 템퍼라멘트’ 사용 가능성도 논의되지만, 핵심은 조 전체를 탐험하는 감각의 혁신이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16세기 수학적 방법으로 12등분을 증명한 전통이 등장한다. 지역과 학파가 달라도, 음악 실천이 요구한 것은 결국 “전 조성의 통일된 질서”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 웰 템퍼라멘트(Well Temperament): 조별 성격 유지 + 전조 가능 - 평균율(Equal Temperament): 조별 색채 희석 + 전 조성 표준화
장단점과 음악사적 결과
평균율의 가장 큰 장점은 전조의 자유와 표준화다. 작곡과 연주, 악기 제작, 합주 조율의 관점에서 모두 명확한 이득이 있다. 조선택의 제약이 사라지며 대담한 전조, 조성적 대비, 긴 호흡의 구조 설계가 가능해졌다. 결과적으로 고전주의의 명료한 형식, 낭만주의의 방대한 조성 여행,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화성 언어가 안정적 기반 위에서 피어났다. 반면 단점도 분명하다. 순정률에서 듣던 “유리잔처럼 맑은 화음”의 미세한 정수비 일치감이 흐려진다. 모든 조가 비슷해진 만큼, 조별 고유한 정서 차이가 줄어들고, 청취자는 섬세한 배음의 합보다 구조적 진행과 색채 대비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손실은 새로운 미학의 탄생으로 보완된다. 평균율은 조성·형식·관현악법의 거대한 실험장이 되었고, 그 확장 끝에서 무조·확장조성·재조율 등 새로운 언어가 등장한다.
장점
- 모든 조에서 유사한 음정 감각 → 자유로운 전조/이조
- 악기 제작·합주 표준화, 교육·분석의 간결화
- 대규모 형식·관현악법 발전의 인프라
단점
- 정수비 일치감 약화(맑은 정협의 감소)
- 조별 캐릭터 희석, 미세한 온기·거칠음의 소실
- 배음 정합성이 중요한 장르에서 미세한 아쉬움
실전: 청취·연주 팁
평균율과 순정률의 차이는 “맞다/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적 선택에 가깝다. 합창·르네상스 레퍼토리를 감상할 때는 순정률을 의식하며 3도·6도의 투명한 합을 곱씹고, 낭만·근대 작품에서는 평균율이 열어 준 전조의 드라마와 형식의 장거리 호흡을 따라가 보자. 연주자라면 건반 기준음(A=440 등)과 합주 튜닝을 분명히 한 뒤, 장면에 따라 미세한 음 정렬(특히 장3도·단3도)을 귀로 보정하는 훈련이 도움이 된다. 작곡자는 평균율 위에서 정합감이 필요한 순간에 특정 성부의 음을 미세 조정하는 방식을 실험해볼 수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플러그인·DAW에서 조율 프리셋을 바꾸어 같은 진행을 서로 다른 조율로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귀의 해상도가 한층 올라간다.
시각자료 1: 12칸의 옥타브 눈금
왼쪽이 기준음(1:1), 오른쪽이 옥타브(2:1). 12개의 반음은 같은 비율 간격(2^(1/12))으로 배치된다. 인간의 음고 지각은 대체로 비율(로그)에 민감하므로,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든 반음 한 칸의 체감은 유사하게 느껴진다.
시각자료 2: 간격 비교표(순정 vs 평균율)
음정 | 순정(비율) | 순정(센트) | 평균율(센트) | 차이(평균율−순정) |
---|---|---|---|---|
옥타브 | 2:1 | 1200.00 | 1200.00 | 0.00 |
완전5도 | 3:2 | ≈701.955 | 700.000 | ≈−1.955 |
완전4도 | 4:3 | ≈498.045 | 500.000 | ≈+1.955 |
장3도 | 5:4 | ≈386.314 | 400.000 | ≈+13.686 |
단3도 | 6:5 | ≈315.641 | 300.000 | ≈−15.641 |
장2도 | 9:8 | ≈203.910 | 200.000 | ≈−3.910 |
단2도 | 16:15 | ≈111.731 | 100.000 | ≈−11.731 |
맺음말: 타협의 미학과 자유의 언어
평균율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정교한 타협이다. 우리는 완벽한 정수비의 맑음을 일부 포기하지만, 그 대가로 조성 공간을 마음껏 항해하는 자유를 얻었다. 이 자유는 작곡가에게는 모험의 지도였고, 연주자에게는 표준화된 언어였으며, 청중에게는 극적 대비와 장거리 호흡을 감상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평균율 위에서 서양 음악은 보편적 문법을 획득했고, 그 문법은 다시 무수한 변형과 도전을 낳았다. 타협은 퇴보가 아니라, 더 큰 가능성을 여는 기술이었다.